새해 붉은 태양이 솟아올랐습니다.
새해 소망하시는 일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앙상한 자태의 겨울나무입니다.
두 가지의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차가움을 먼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치 배고플 때 음식의 냄새를 먼저 맡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둘째, 떠오르는 태양을 먼저 볼 수가 있습니다.
잎을 다 떨어뜨려 시야를 확보하였으니 말입니다.
나무의 가지 끝을 거쳐 병신년 새해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살면서 숱한 난관을 봉착하게 됩니다.
직면한 어려움 때문에 당장 죽을 것 같은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만 지나면 살아갈 길이 훤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최악의 직면 다음에는 치고 올라가는 일만 남는 것입니다.
롤러코스트를 탑니다.
최고의 스피드로 정점에 이를 즈음 숨이 멎습니다.
그 순간이 1초만 더 길었다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이 2초가 더 연장되었다 하여도 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시간에 관계없이 숨이 멎을 즈음에는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최악의 순간까지 견디는 능력을 타고 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에는 죽을 난관은 없는 것입니다.
산꼭대기의 봉우리에 습기가 모입니다.
작은 입자가 여럿 모여 물방울이 됩니다.
방울들이 응집하여 계곡으로 흘러내리면서 싹을 튀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번성한 숲을 만들어 뭇 생명들이 기댈 수 있게 합니다.
그 출발은 작은 입자였지만 그 끝은 거대한 숲이 되는 것입니다.
길이 아무리 멀다하여도
향하여 가는 걸음이 잰걸음이라 하여도
걷고 또 걸으면 길의 끝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여정이 고단하고 멀리에 있다고 불평할 일은 아닙니다,
알프스의 외딴 초원에 목동의 집이 있습니다.
눈이 내려 길이 막히니 겨울을 나는 곳입니다.
겨울동안에는 외부와 고립된 목동입니다.
봄이 되어 초원에 움이 틀 때가 되어서야 고립이 해제되는 것입니다.
외딴 곳이라 하여 삶이 포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골 개울가의 둑엔 초원처럼 들풀이 돋아나고
여린 새싹의 움틈처럼 아이들의 삶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새싹의 움틈이 목동의 고립을 해제하듯,
여린 새싹처럼 어린 아이의 희망이 싹트는 것입니다.
돌아가느라 먼 길이면 또 어떠랴
그 만큼의 수고로움이 더 쌓였으니 말입니다.
비켜가느라 구불거린 길이면 또 어떠랴
그 만큼의 족적을 더 남겼으니 말입니다.
걷고 또 걸으면 길의 끝은 나오는 것입니다.
텅 빈 것은 또 텅 빈 것으로 두면 되고
휑하니 떠나 버린 빈자리는 또 빈자리로 남겨두면,
내가 아니라도 뒤에 오는 누군가가 채우게 될 것이고,
내가 아니라도 뒤에 오는 누군가가 앉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비었다고 애석할 일도 아니고,
그러하니 빈자리라 하여 아쉬워할 것도 아닙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졌습니다.
지난 50년이 5천년의 문명발달을 이루었다고도 합니다.
시간은 그렇게 나아갔는데,
인간의 생각함과 인간의 행동함이 더욱 이기적으로 얕아졌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인간의 행함과 마음이 더욱 관대해지고 그만큼의 품격이 높아져야 합니다.
더 얕은 속임수와 이기적 이속을 챙기려는 술수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퇴행입니다.
가난하였던 시절의 이웃을 배려하던 품성이 다 사라졌습니다.
문명의 발달이 얕게 행하는 인간들을 활개 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문명의 발달이 오히려 더불어 사는 인간들을 편 가르고 있습니다.
문명의 발달이 오히려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행태가 되고 있습니다.
백설이 내리면 가지 큰 소나무가 다 받아드립니다.
적설의 견딤을 이기지 못하고서 가지가 부러집니다.
부러져서 아픈 것이지만 그리하여 소나무 전체가 온전히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라면 그것이 가시덤플이 막아도 걷지 못할 길이 어디 있으며
같이라면 그것이 깊은 수렁이라도 넘지 못할 계곡이 어디 있으며
여럿이라면 험하다하여도 오르지 못할 산이 어디 있을까.
같이는 결국 함께 이루어 가치를 높이는 것이 됩니다.
병신년 새해,
같이 이룰 수 있는 많은 다짐들을 만들길 바랍니다.
다짐하였으니 이루게 되는 멋진 한 해가 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