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한글 창제는 나머지 지도자들의 업적을 다 합쳐도 모자랄 절대적인 위업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알파벳은 오늘날의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의 지중해 연안에 걸쳐 존속하
던 페니키아(BC 1200~BC 650)에서 발생하여, 3천년 동안 여러 민족과 나라를 거치면서 계속 변화하
고 발전해온 문자다. 이에 비해 한글은 세종대왕의 독창적인 기획에 따라 10년도 안 되는 단기간에
체계가 완성된 문자다. 미국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그 짧은 기간에 만든 문자가 만물의 소리와 형
상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이라고 극찬했다. 한글 덕분에
우리나라는 IT강국으로서 제4차 산업혁명의 선두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수많
은 인재를 배출하고 학문적 성과를 이룩했으며, 개국 초부터 혼란을 겪어오던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필요한 법령을 제정하여 국가기반을 공고히 했다. 또한 농업 기술 의약 음률 등 실용적인 분야의 연
구 발전에 매진하여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최윤덕 김종서 등 여러 장수를
보내 함경도에 사군육진을 설치하도록 명함으로써 국경을 자주 침범하던 오랑캐들을 압록강과 두만
강 이북으로 쫓아내고 국경을 공고히 했다.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여러 조치도 재
위기간 내내 실시했다.
세종은 소헌왕후에게서 세자 향(문종)을 비롯한 8명의 대군과 2명의 공주를 얻었으며, 12명의 후궁
출산을 합해 모두 18남 4녀를 얻었다. 18남은 조선왕 가운데 가장 많은 왕자 출산이다. 세종 28년(14
46), 금슬이 자별하던 소헌왕후가 승하했다. 향년 52세. 세종은 왕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신하들에게
훈민정음으로 「월인석보」를 지어 바치도록 했으며, 궐내에 내불당을 지어 왕비의 명복을 빌었다.
유교의 나라에 무슨 절이냐며, 성균관 유생들이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성균관의 동맹휴학은
임금에 대한 최고 수준의 저항이었다. 영의정 황희가 유생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겨우 동맹휴학을 풀었다.
황희는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설립하자 관료 및 학자 72賢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저항했
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이방원이 두문동에 불을 질러 이들을 학살할 때, 원로들은 장래가 촉망되는
어린 황희를 강제로 내쫓았다. 황희는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여 이씨왕조의 녹을 먹기 시작했다. 세종
시절, 황희는 무려 18년 동안 영의정을 역임했다. 무난한 성품에 임금의 절대적 신임이 더해져 조선
조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전라도 강진 유배생활,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기간, 10‧26사태로 청와대를 떠난 박근혜가 국害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야인으로 지낸 기간 등도 모두 18년이었다.
재위 32년(1450), 와병한 세종은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또한 병약한 세자 향(珦)이 보위에
오르더라도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점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세종은 김종서와 정인지를 가까
이 불렀다.
“세손 홍위(弘暐. 단종)를 잘 부탁하오.”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두 신하를 불러 은밀하게 남긴 유일한 고명(顧命)이었다. 세자가 아니라 세손
을 부탁한 세종은 이미 차남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심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김종서는 충실하게 고
명을 받들다가 목숨을 잃었고, 간신 정인지는 부귀영화를 좇아 수양에게 훼절(毁節)한 뒤 앞장서서
단종을 보위에서 끌어내려 사사(賜死)했다.
세종은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의 경치 좋은 언덕 위에 안장되었다. 이름하여 영릉(英陵), 영민한 임금
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세종의 유언에 따라 2년 먼저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와 합장함으로써 영릉은
조선왕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사후에 금슬을 되찾은 것이다. 세종이 통치한 32년 동안, 조선의 백
성들은 대왕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영광스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