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회(1972년 졸업)
글 수 175
원주 치악산(비로봉, 해발 1,288미터)
이기심이다.
세상을 조금 움직인다.
이해타산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타심이다.
세상을 전부 움직인다.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8할의 이기심.
2할의 이타심.
세상이 그렇게 작동한다 하여도,
세상은 감동의 도가니가 된다.
이타심은 요원처럼 타오르기 때문이다.
딱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산에는 8할이 넘는 이타심과 2할에 못 미치는 이기심이다.
산에 들면 누구라도 마음이 그렇게 너그럽다.
산에 들면 모르는 남에게도 반가운 인사를 한다.
물드는 단풍이다.
저 혼자의 의지가 아니라
시간의 조류를 타고서 타오르는 단풍인 것이다.
끝가지에서 먼저 시작이다.
먼저 시작한 끝가지의 단풍이 가장 늦게 진다.
마치 엘리베이터의 승차처럼
늦게 핀 단풍이 먼저 지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아내고서 웃어 본다.
나무의 끝가지에는 단풍의 시작과 퇴장이 함께 있는 것이다.
가지의 끝자락에 살포시 눈을 맞춘다.
폐허의 기둥처럼 입석대가 적요하다.
홀로 우뚝 솟은 입석대가 그저 겸허하다.
맞은편의 신선대가 겸연쩍은 듯 적요하다.
내면과 외연이 공존한다.
내면은 속으로 가두어 단절이다.
외연을 겉으로 넓혀 연결이다.
입석대가 내면이라면,
그에 연결된 능선은 외연이다.
삶이란 단절의 내면이 아니라,
삶이란 외연의 과정인 것이다.
외연에서 겸허하여야 함을 입석대가 보여주고 있다.
밤잠을 잊은 초병이다.
모진 훈련을 견디었을 것이다.
사무치는 향수병도 극복하였을 것이다.
연병장의 흙먼지도 마셨을 것이다.
정상인 비로봉이 저 만치이다.
연병장처럼 넓은 바위를 거느렸다.
연병장이 평평하고 고른 이유는,
행여 초병이 돌부리에 다칠까 노심초사한 지휘관덕이다.
비로봉정상의 가지런한 돌탑은,
행여 흘러내려 산이 상할까 어즈버 배려한 인간의 의지이다.
비로봉보다도 더 높이 솟은 세 개의 돌탑.
산신령의 계시에 의하여 세워진 그 돌탑에는 요동하는 세월이 다 담겨 있다.
세상의 것들이 그곳에 이르면 다 용해되는 것이다.
하산길이 가파르다.
난간이 급경사이다.
그곳에 바위가 용솟음했다.
가파름을 완충하는 바위이다.
가파름에 매듭하나 만든 바위이다.
용모조차도 수려한 바위이다.
그 바위의 측면을 돈다.
더 많이 부대끼고 싶은 것이다.
입석대를 닮았다.
신선대를 닮았다.
그곳에 사다리병창을 대면한다.
병창이란 ‘언덕’ 혹은 ‘단애’를 뜻한다.
그 가파름에 사다리를 펼친 것이다.
사다리란 오르기 위함만이 아니라
사다리란 마주보며 가야 하는 인생의 궤적인 것이다.
동행이 있다면 가파른 사다리병창이 수월한 것이다.
동행이 있다면 험난한 세상이 수월한 것이다.
세렴폭포가 요란하다.
환호를 연상했다가,
그 작은 크기에 보태는 실망이 그렇다.
산의 것들이란,
규모가 아니라 그 품은 세월인 것이다.
가벼운 것은 인간의 심사이지만,
세렴폭포는 그곳에서 유구한 것이다.
참지 못하고 내 뱉는 것이 인간의 언어이지만,
세렴폭포는 그곳에서 의연한 것이다.
세렴폭포 앞에 정좌하고 앉는다.
세상에서의 유구한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을 행하는 것임을,
세상에서의 의연한 것은
따돌려서 소외가 아니라 경청하여 소통하는 것임을,
이기심이다.
세상을 조금 움직인다.
이해타산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타심이다.
세상을 전부 움직인다.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8할의 이기심.
2할의 이타심.
세상이 그렇게 작동한다 하여도,
세상은 감동의 도가니가 된다.
이타심은 요원처럼 타오르기 때문이다.
딱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산에는 8할이 넘는 이타심과 2할에 못 미치는 이기심이다.
산에 들면 누구라도 마음이 그렇게 너그럽다.
산에 들면 모르는 남에게도 반가운 인사를 한다.
물드는 단풍이다.
저 혼자의 의지가 아니라
시간의 조류를 타고서 타오르는 단풍인 것이다.
끝가지에서 먼저 시작이다.
먼저 시작한 끝가지의 단풍이 가장 늦게 진다.
마치 엘리베이터의 승차처럼
늦게 핀 단풍이 먼저 지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아내고서 웃어 본다.
나무의 끝가지에는 단풍의 시작과 퇴장이 함께 있는 것이다.
가지의 끝자락에 살포시 눈을 맞춘다.
폐허의 기둥처럼 입석대가 적요하다.
홀로 우뚝 솟은 입석대가 그저 겸허하다.
맞은편의 신선대가 겸연쩍은 듯 적요하다.
내면과 외연이 공존한다.
내면은 속으로 가두어 단절이다.
외연을 겉으로 넓혀 연결이다.
입석대가 내면이라면,
그에 연결된 능선은 외연이다.
삶이란 단절의 내면이 아니라,
삶이란 외연의 과정인 것이다.
외연에서 겸허하여야 함을 입석대가 보여주고 있다.
밤잠을 잊은 초병이다.
모진 훈련을 견디었을 것이다.
사무치는 향수병도 극복하였을 것이다.
연병장의 흙먼지도 마셨을 것이다.
정상인 비로봉이 저 만치이다.
연병장처럼 넓은 바위를 거느렸다.
연병장이 평평하고 고른 이유는,
행여 초병이 돌부리에 다칠까 노심초사한 지휘관덕이다.
비로봉정상의 가지런한 돌탑은,
행여 흘러내려 산이 상할까 어즈버 배려한 인간의 의지이다.
비로봉보다도 더 높이 솟은 세 개의 돌탑.
산신령의 계시에 의하여 세워진 그 돌탑에는 요동하는 세월이 다 담겨 있다.
세상의 것들이 그곳에 이르면 다 용해되는 것이다.
하산길이 가파르다.
난간이 급경사이다.
그곳에 바위가 용솟음했다.
가파름을 완충하는 바위이다.
가파름에 매듭하나 만든 바위이다.
용모조차도 수려한 바위이다.
그 바위의 측면을 돈다.
더 많이 부대끼고 싶은 것이다.
입석대를 닮았다.
신선대를 닮았다.
그곳에 사다리병창을 대면한다.
병창이란 ‘언덕’ 혹은 ‘단애’를 뜻한다.
그 가파름에 사다리를 펼친 것이다.
사다리란 오르기 위함만이 아니라
사다리란 마주보며 가야 하는 인생의 궤적인 것이다.
동행이 있다면 가파른 사다리병창이 수월한 것이다.
동행이 있다면 험난한 세상이 수월한 것이다.
세렴폭포가 요란하다.
환호를 연상했다가,
그 작은 크기에 보태는 실망이 그렇다.
산의 것들이란,
규모가 아니라 그 품은 세월인 것이다.
가벼운 것은 인간의 심사이지만,
세렴폭포는 그곳에서 유구한 것이다.
참지 못하고 내 뱉는 것이 인간의 언어이지만,
세렴폭포는 그곳에서 의연한 것이다.
세렴폭포 앞에 정좌하고 앉는다.
세상에서의 유구한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을 행하는 것임을,
세상에서의 의연한 것은
따돌려서 소외가 아니라 경청하여 소통하는 것임을,